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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 호두마을 수행지도법사 혜 송 스님
  글쓴이 : 마을지기     날짜 : 06-10-26 15:29     조회 : 9206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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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호두마을 수행지도법사 혜 송 스님
목숨 건 3년간의 토굴 정진
미얀마 수행통역사로도 명성
기사등록일 [2005년 02월 01일 화요일]
 

1978년 11월 대구 동화사 주차장. 채 스무 살도 안된 한 여학생이 버스에서 내리더니 동화사 쪽을 향해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때마침 같이 오르던 한 비구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혼자 어딜 그렇게 열심히 가지?”
“스님 되려고 절에 갑니다.”
“젊은 여학생이 출가는 왜?”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려고요!”

고개를 끄덕이던 스님은 동화사에 다다르자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장일 비구니 노스님을 그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출가자의 길만큼 힘든 것도 없지. 늘 춥고 배고픈 생활이야.”
“도라지 뿌리만 캐먹더라도, 설령 수행하다 길거리에서 얼어 죽어도 좋다는 각오쯤은 돼있습니다.”
“그런 생각이라면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속히 오도록 해!”

버스 타러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은 나는 듯 가벼웠다.
어린시절 그는 책을 유난스레 좋아했고 점심시간이면 친구들에게도 곧잘 옛날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위인전을 열심히 탐독하던 중 죽음의 문제와 덜컥 맞닥트렸다.

‘이토록 훌륭한 사람들조차 죽는구나. 그럼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되나,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활달하던 그의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뀐 것도 이 무렵부터다. 수업을 들어도, 집으로 돌아와도, 친구들과 놀아도 마음 한켠에는 늘 ‘죽음’이 시뻘건 눈을 부릅뜬 채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태연할 수 있든지 아니면 생사를 초월하는 길뿐이다’란 생각이 확고해져 갔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은 그의 소녀시절을 하루하루 갉아갔고, 몇 해 뒤엔 중학교 수학여행을 가게 됐다. 고향이 해인사 부근인 그였지만 부친이 유학자였던 탓에 절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런 그가 그렇게 큰절을 찾은 것은 수학여행이 처음이었다. 불국사와 통도사의 장엄함, 특히 석굴암 부처님을 봤을 때 온몸에 흐르던 전율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그는 비로소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출가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수학여행 후 그는 ‘어떻게 하면 스님이 될까’ 하는 생각과 ‘스님이 되려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동시에 다졌다. 종가집 맏딸이었기에 공부하는 틈틈이 집안일과 밭일을 적극 거들었다. 그럼에도 서산에 해가 걸릴 무렵이면 오늘도 또 갔구나 하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곤 했다.

그토록 소원했던 출가를 10대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실현하게 됐으니 그 얼마나 기뻤으랴. 집으로 돌아와서 눕거나 앉거나 일을 해도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께 ‘출가의 변’을 적은 편지를 책상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고 집을 나섰다. 출가해 깨닫는다면 자신의 생로병사 문제뿐 아니라 삼계(三界)의 어머니가 돼 고통 받는 중생들을 보살필 수 있으리라 그는 믿었다. 그것이 또한 자식이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라는 생각과 함께….

그는 직지사 산내 암자인 백련암으로 출가했다. 낮이면 마을로 탁발을 가거나 아니면 땔감을 구하려 산을 올라야 했고, 저녁이면 졸린 눈을 비벼 뜨고 경을 외웠다. 그렇게 세 해를 보낸 81년 3월에야 그는 정식 스님이 됐고, 혜송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그러나 지독히도 가난한 절이었던 탓에 나무하고 불 때는 스님의 일과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집을 떠난 지 꼭 열 번째 되던 해 스님은 결국 깊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지난 10년간 나는 스님이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한 게 있나? 하나도 없다! 집 떠난 맏딸을 찾아 이절 저절 떠돌던 부모님이 이곳까지 와 나를 부를 때도 나는 방안에 숨은 채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의 나는 뭔가? 나는 그저 한심한 밥도둑에 불과할 뿐이다.’

스님은 밥 먹는 게 죄스러웠고, 누가 스님이라고 부를 때면 불에 덴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스님? 스님이라고?’

걸망하나 짊어지고 스님은 절을 나섰다. 그리고는 물 위에 뜬 기름방울마냥 사바세계를 떠다녔다. 이곳저곳 사찰을 헤매며 삼천배 만배는 물론 밤새 참회의 눈물을 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슴 밑바닥에 맺힌 응어리는 쉬이 가실 줄 몰랐다. 하루 한 끼 먹는 음식조차 사치스러워보였다. 차라리 이렇게 부초처럼 떠다니다 사라지는 게 나을성 싶었다.

속가 어머니가 찾아온 것은 스님이 3년째 방황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디서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어머니는 스님에게 말했다.

“내는 여자제, 비구니제, 몸도 약한 게 언감생심 수행을…. 요론 마음 내서 어떻게 도를 이루겄소. 도라는 건 생사를 걸어야 한다지 않으요. 죽을 각오로 한번 해보이소, 시님.”

피눈물을 쏟는 어머니를 보며 스님은 93년 2월 고향 부근의 한 토굴에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여태껏 해 오던 화두 대신 『금강경』을 붙잡았다. 처음 며칠은 30~50독씩 하는 것도 버거웠지만 나중에는 가속도가 붙어 80독, 많을 때는 100독도 가능했다. 하루 한 끼만 먹을 생각이었지만 나중에는 그 한 끼조차 거를 때가 많았다. 금방 경전을 잡았는가 싶은데 날짜와 시간을 보면 며칠씩 훌쩍 지나간 것도 예사였다. 스님은 24시간 내내 『금강경』이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수천수만의 혈관 속에서 펄떡펄떡 흐를 수 있도록 하고자 애썼다. 또 독송과 더불어 수시로 『금강경』 한 글자 한 글자 온갖 정성을 들여 사경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3년 뒤 『금강경』 3만독을 마치고 토굴을 나왔을 때 스님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얼굴색부터 환하게 바뀌었을 뿐 아니라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태산 같은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까지 전혀 생소했던 수행과의 인연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토굴생활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스님은 우연히 미얀마를 순례하게 됐다. 불과 일주일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그곳 수행센터에서 만난 수행자들의 모습은 스님을 남방불교수행에 깊은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아! 이거였구나.’
한국에 들어온 스님은 곧바로 짐을 꾸려 다시 미얀마로 날아갔다. 언어가 유창한 것도,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자신의 삶을 이끌 선지식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위파사나를 시작한 스님은 ‘일거수일투족뿐 아니라 아픔까지도 그저 관하라’는 말에 따라 그렇게 하고자 했다. 때로는 ‘이러니까 소승이지’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 발로 찾아온 구도의 길, 모든 것을 믿고 따르자’는 마음으로 추스르며 밀어붙였다.

특히 수행의 적 수마(睡魔)에게 ‘단 1/1000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비상한 각오로 졸음 자체를 집중하고 관찰해 나갔다. 그해 12월 귀국하기까지 하루 2시간 이상 잔 적이 없고, 하루 두 끼 허용된 식사도 마다하며 줄곧 한 끼로 수행했던 것도 스님의 이런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이후 미얀마와 국내를 오가며 수행하던 스님은 지난 2000년 12월에는 스승 우 에인다까 스님의 권유로 미얀마어를 배우기 시작해 불과 1년 만에 현지인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탁월한 수행 통역사의 한 분으로 스님이 손꼽히는 것도 이 때부터다.


지난해 초 스님은 직지사 백련암 도감 소임을 맡게 됐지만 위파사나 보급을 위해 지난 1월부터 천안 호두마을(www.vmcwv.org)에서 위파사나 지도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럽고 섬뜩할 정도로 느껴져 오는 탐냄, 성냄, 욕심의 질긴 고리들, 찰나 속에 구현되는 삼법인의 여실한 세계…. 진실로 스님은 ‘관(觀)’이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의 중생을 위한 거룩하고 자비스러운 가르침임을 확신한다. 그게 혜송 스님으로 하여금 수행자의 길과 지도자의 길을 동시에 걷도록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직지사 백련암=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790호 [2005-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