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호두마을 > 보도자료
 
   
  “수행자는 바리때 하나면 족하지요”
  글쓴이 : 마을지기     날짜 : 06-10-26 15:31     조회 : 8682     추천 : 0    
  트랙백 주소 : http://www.vmcwv.org/bbs/tb.php/menu1_4/7
“수행자는 바리때 하나면 족하지요”
천안 호두마을 선원장 우에인다까 사야도
기사등록일 [2005년 05월 19일 목요일]
 

미얀마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아온 우에인다까 사야도(Sayadaw U Eindaka)가 한국과 이토록 깊은 인연이 있는 줄은 그 자신도 미처 몰랐다. 그녀를 만나러 처음 한국 땅을 밟던 2003년 4월 6일전까지는….

마하시 사야도의 손제자로 따담마란디 선원에서 수행을 지도하던 그는 한국을 방문하기 얼마 전 시한부 삶을 사는 대구 현풍의 한 중년 여인이 자신을 몹시 보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사업을 해가며 가족을 돌봤으나 정작 자신이 병들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이 쓸쓸히 죽어가고 있으며, 그 여인의 마지막 소원이 자신에게 가사를 바치고 계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따담마란디에서 정진했던 한국인들에 의해 자신의 얘기가 전해졌음을 그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의 간절한 소원. 자비를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 수행자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그는 스승 우 쿤다라 비왐사 큰스님의 허락을 받아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사야도는 즉시 현풍으로 향했다.

사야도가 그녀의 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해는 이미 지고 그 여운만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 그녀는 메마른 가슴을 안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죽음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너무 고통스럽고 무서워요, 스님.”
힘들게 내뱉은 그녀의 말이 사야도의 마음에 아프게 메아리쳤다.
“몸은 아프더라도 마음까지 휩쓸리지 않도록 부디 노력하세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온 힘을 두 팔에 모아 가사를 받쳐 들었다.
순간 사야도는 코끝이 찡해오며 2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 권유로 10세 때 출가

미얀마의 시골동네에서 자란 그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오로지 어머니 때문이었다. 비교적 집안이 넉넉했던 덕에 그의 어머니는 수시로 스님들에게 대중공양을 했고 8일, 15일, 24일, 31일 등 재일이 되면 오계는 물론 오후불식에, 음악도 듣지 않았으며, 화려한 치장을 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절에 다녔던 그는 위의 두 형들처럼 ‘4명의 사야도를 만들겠다’는 어머니의 서원에 따라 출가자의 길을 가야 했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그였지만 나중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절생활을 하려 힘썼다. 그렇게 스무 살이 넘어 비구계를 받을 무렵 두 형은 환속을 했고, 몇 해 뒤 막내마저 절을 떠나가고야 말았다. 어머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얘야, 너는 부디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절에서 생활하렴.”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가 아니더라도 그는 마음속으로 평생 출가자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뒤였다. 그런 까닭에 우에인다까는 이 길을 걷도록 이끌어준 어머니에게 늘 감사드리고 있었다. 미얀마 전통의 청정한 가풍에 절로 물이든 그는 여러 교육기관과 제방 스승을 찾아다니며 경전, 율장, 논서들을 하나하나 섭렵해 나갔다. 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는 이론부터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잘 고치기 위해서는 질병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에인다까가 스물아홉 살 되던 해,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그에게 고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통증과 공포로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세속의 즐거움보다 성스러움을 추구했던 맑은 여인…. 우에인다까는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팔베개를 해드린 채 호흡하는 법, 통증을 관찰하는 법 등을 정성껏 가르쳐드렸다. 이틀 뒤 그의 어머니는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이후 우에인다까는 어머니의 은혜를 갚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5년간 강원에서 ‘간타와사까’(강사)를 맡으며 지독히 공부했다. 또 나중에는 전국의 선원을 찾아다니며 12~20시간의 용맹정진을 했고, 이를 통해 다양한 수행법을 온몸으로 익혀나갔다.

‘그 누구도 노력 없이 성공한 이는 없다. 마음을 조절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얻은 권리가 아니다. 성공한 이의 자유는 인내 덕분이다.’라는 마하시 사야도의 말처럼 니르바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뿐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구도열정 때문인지 아니면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 때문인지 수행 진전은 놀랍도록 빨랐다. 수많은 제자들 둔 스승 우 쿤다라 비왐사도 날이 갈수록 우에인다까를 신뢰했다. 한번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인적이 드문 밀림지역에 들어가 5년간 홀로 탁발을 해가며 가시 돋힌 수많은 대나무들을 잘라냈고, 그곳에 여법한 도량을 완성하기도 했다.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수행을 지도할 수 있는 ‘사야도’로 추대되고 국가가 인정하는 ‘담마 까디까’(법문법사)의 품계까지 받은 그였지만 ‘비구는 바리떼 하나만 있으면 산다’는 그의 초발심은 변함이 없었다.

깊은 경전 이해 토대로 수행지도

이역만리를 날아와 한 여인의 죽음과 마주한 사야도. 그는 여인을 위해 수계를 내리고 팔리 경전을 하나하나 독송했다. 태풍 속 나비의 여린 날개짓처럼 허공을 향해 몸부림치던 그녀는 사야도의 맑은 음성과 더불어 고요해져 갔다. 그리고 새벽 2시, 마침내 그녀는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며칠 뒤 우에인다까 사야도가 방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그에게 위파사나 지도를 부탁하는 요청들이 잇따랐다. 미얀마에서 100일 넘게 매일 색다른 주제로 수많은 경전을 외워 수행법문을 했던 사야도는 호두마을, 봉인사, 전북불교회관, 익산 백운사 등을 방문해 한국 수행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수행방법만을 강조하거나 이론만을 부각시키려 하지 않고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수행에 적용시켜 쉽게 설명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던 팔정도의 경우 춘다의 공양을 받은 부처님이 아픈 몸을 이끌고 쿠시나가르에 이르러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에게 팔정도를 설하게 된 배경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 이어 팔정도가 부처님이 강조했던 불교수행의 핵심임과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했다.

즉 정견(正見)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대로의 실제 성품을 보는 것, 정유(正思惟)는 마음이 달아나면 다시 관찰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 정어(正語)는 수행하며 일어난 것을 가감 없이 스승에게 그대로 말하는 것, 정업(正業)은 죽이지 않으며 싸우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않는 것, 정명(正命)은 허물 짓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 정정진(正精進)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려 하는 것, 정념(正念)은 마음에 대상을 강하게 밀착해 깊이 관찰하도록 하는 것, 정정(正定)은 수행할 때 마음을 차분히 고요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이들 중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를, 정어, 정업, 정명은 계율을, 정정진, 정념, 정정은 선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팔정도 안에 계정혜 삼학의 체계가 완벽히 갖추고 있음을 설명했다.

미얀마에 한국인 센터 12월 개원

사야도의 탁월한 수행법문과 지도에 감동받은 사람들의 보시가 잇따랐다. 그는 이 보시금을 잠깐의 만남 뒤 세상을 떠난 그 여인과 다른 한국인들을 위해 미얀마 언어 등 걱정없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담마마마까 마하시센터를 건립할 것을 서원했다. 그리고 오는 12월 5일 드디어 이곳에 4만평 대지에 큼직한 센터가 문을 연다.

새벽 3시 일어날 때부터 밤 10시 취침에 들 때까지 늘 정진하거나 경을 읽거나 글을 쓴다는 우에인다까 사야도. 지난 1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위파사나 수행처 호두마을 선원장을 맡은 그는 ‘수행이란 마음과 육체의 끊임없는 변화에 미혹되지 않는, 생사를 넘어선 행복의 추구’라며 호수같이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천=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804호 [2005-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