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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곡 위빠사나 소개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06-09-02 00:25     조회 : 6724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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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곡 위빠사나의 특징;


현재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위빠사나는 주로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 계열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마하시 사야도 계열의 위빠사나와 이제 설명하게 될 모곡 사야도의 위빠사나는 모두 검증되고 훌륭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모곡 센타의 특징은 수행에 앞서서 충분한 󰡐법에 대한 이해󰡑를 강조합니다. 이 󰡐법에 대한 이해󰡑는 주로 '12 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다만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곡 사야도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12 연기와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의 생멸에 대한 관찰이 결합되는 것입니다.

즉 먼저 12 연기라는 인과의 법칙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에 따라 실제적인 수행-오온의 생멸에 대한 관찰을 하는 방식으로, 이론이 수행을 뒷받침하고 실제적인 수행은 다시 법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켜 수행을 심화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는 체계입니다.


․모곡 사야도에 대한 간략한 소개


본래 모곡 사야도는 미얀마에서 아비달마의 큰 스승으로 알려진 레디 사야도의 뒤를 잇는 대강사로 아비달마를 비롯한 삼장에 정통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얀마 북부에 있는 대학에서 30년 이상을 불교 심리학과 경전의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던 중 스스로를 ‘가축을 돌보지만 그 가축들이 만드는 우유는 맛을 볼 수 없는 목동과 같다’고 생각하시고 동굴에서 홀로 오온의 생멸에 대한 위빠사나를 통해 커다란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 몇 년 뒤 신도들의 요청에 따라서 위빠사나의 가르침을 펼치셨고 1962년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곡 사야도는 위대한 학자이면서 다만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수행을 통해서 그 가르침을 깨달은 위대한 수행자이십니다.  

모곡 사야도에 대한 다양한 일화가 있는데 특히 화장한 후 눈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적(異蹟)이 가장 유명합니다.  

      

․모곡 센타의 특징


현재 모곡 사야도의 가르침을 계승한 모곡 센타에서 행해지고 있는 위빠사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10일 코스로 진행되며 하루에 한 번 이상의 12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 그 법문에 대한 충분한 사유 후에 실제 수행에 들어갑니다.

 이번 호두마을에서의 수행에서도 12연기와 7가지 청정에 대한 법문을 위주로 이해하기 쉽게 우 소바나 사야도께서 법문을 하실 예정입니다. 각자 수행에 대한 인터뷰는 시간을 따로 할애하지는 않지만, 법문 후에 개별적인 질문에 대하여 충분히 답해주실 예정입니다.

둘째, 실제 수행은 오온의 생멸에 관한 관찰 즉 위빠사나입니다. 모곡 센타에서는 4념처 중 마음을 관찰하는 심념처에 중점을 둡니다. 그러나 심념처를 한다고 하여 다른 몸․느낌․법에 대하여 관찰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관찰한다는 것은 곧 모든 념처들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입니다, 특히 느낌은 항상 마음과 더불어 일어나는 것으로, 다만 중심이 마음과 느낌에 대한 관찰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번 호두 마을 집중 수행에도 이를 중심으로 하여 좌선과 경행을 반복할 예정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http://www.edhamma.com/sayadaws/mogok.htm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모곡 센타의 법문에서 참고가 될 몇 사항을 간략히 발췌한 것입니다.



․ 12 연기를 이해함으로 얻어지는 이득


1. 수행자가 緣起(paṭiccasamuppāda)사상의 취지를 완전히 이해할 때, 그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관통하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즉 모임(蘊; khandha)들이 일어나는 과정을 인과의 법칙에 따라 완전히 이해할 때, 죽음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단멸(uccheda)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없앨 수 있다. 그리고 이전의 모임(蘊)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일어나는 과정을 인과의 법칙에 따라 완전히 이해할 때, 자아 혹은 세상이 영원하다는 상주(sassata)라는 잘못된 견해를 없앨 수 있다.

수행을 시작하려는 수행자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즉 단지 그것이 원인과 결과의 과정에 지나지 않고, 거기에는 존재도 남자도 여자도 자아도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깨달을 때, 그는 자아(attā) 혹은 有身見(sakkāya diṭṭhi;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믿음=에고이즘)이라는 가리워진 베일로부터 잠시 동안 벗어날 수 있다(tadangapahāna).


2. 인과(因果)를 이해하는 지혜(緣攝受智; paccaya pariggaha ñāṇa)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인과법칙의 결과로서 이해할 때 얻어 진다.


3. 무명(avijjā)과 갈애(taṇhā)와 업의 형성(saṅkhārā) 때문에 다섯 모임(五蘊; pañcakhandha)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깨달으면, 수행자는 세계가 지고한 존재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견해(Issaranimāna diṭṭhi),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은 선 혹은 악의 어떠한 과보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견해(akirya diṭṭhi),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모든 것은 원인이 없이 우연히 일어난다는 견해(ahetuka diṭṭhi)의 잘못된 견해들을 없앨 수 있다.


4. 緣起(paṭiccasamuppāda)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수행자는 소위 ‘나’라고 생각되는 모임(khandha)들은 마음과 물질이라는 현상- 즉 물질(rūpa), 느낌(vedanā), 지각(saññā), 형성작용(saṅkhāra), 의식(viññāṇa)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끊임없는 과정의 누적된 집합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사띠(正念)의 확립(satipaṭṭhāna; 念處); 위빠사나 수행의 진전


모곡 사야도는 사띠(마음지킴, 마음챙김)의 확립〔念處〕을 세 부분으로 나누셨다.


1. 사띠의 확립(satipaṭṭhāna); 사띠(正念)와 알아차림(正知)

2. 사띠 확립의 수행(satipaṭṭhāna-bhāvanā);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관찰

3. 사띠의 확립으로 이끄는 길(satipaṭṭhāna-gāminipaṭiipadā); 형성작용(sankhāra)

                                        즉 일어남과 사라짐의 소멸로 이끄는 길

좀 더 명료하게 하자면,

1. 집중된 마음을 어떤 일어난 대상 즉 들숨 혹은 날숨 혹은 몸 혹은 마음의 움직임에 고정시키는 것, 이것을 사띠의 확립이라고 부른다.

2. 물질현상, 느낌, 마음. 법이 일어났다가 곧바로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사띠확립의 수행이다.

3. 조건지워진 현상(有爲法)에 대한 지혜 즉 ‘모임(蘊)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이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아는 것’ 바로 이것이 사띠의 확립으로 이끄는 길이다. 이 길은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형성작용(sankhāra)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따라가면서 대상에 마음을 지키는 것(隨念; anusati)은 사마타에 포함되는 반면에,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隨觀; anupassanā)은 위빠사나의 범주에 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임(蘊)의 일어나고 사라짐이 무상(anicca)․고(dukha)․무아(anatta)로 통찰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코 위빠사나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특히 심념처가 중요한 이유


 모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행위는 마음이 조정하거나 협조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할 때, 마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행위도 처음에 그것에 대하여 의도하지 않고는 행해지지 않고, 이 의도(thinking)는 오직 마음에서만 일어난다. 우리의 마음이 조절될 때 행위 또한 조절된다. 마음이 조절되지 않는다면 육체적 행위는 제한이 없이 생각과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할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우리의 행위들을 조절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에고이즘, 나, 인격체라는 잘못된 견해가 거주하는 곳은 바로 이 마음이며, 또한 유신견(有身見)이 자라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 혹은 자아에 대한 미혹은 마음의 뒤에 있는 추진력이다. 따라서 어떤 정신적, 육체적, 언어적 행위가 일어날 지라도 이것은 마음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인격체 혹은 에고이즘 혹은 유신견이 마음을 가리고 있는 요소라고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남방 7論의 하나인 분별론(vibhaṅga)의 주석서인 sammohavinoti에서 ‘diṭṭhicaritassapi mandassa nātippabhedagataṃ cittānupassanāsatipaṭṭhānaṃ visuddhimaggo, 잘못된 견해로서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극도로 분별하지 않고 마음을 따라가면서 보는 사띠(正念)의 확립(念處)이 청정의 길이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diṭṭhi)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지적으로 어리석은 자에게는  너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마음을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心隨觀)이 道의 실현을 위해 적절하다는 뜻이다.

돌아가신 大德(Mahā thera) 모곡 큰 스님은 삼장(三藏; piṭaka)에 정통하셔서, 모든 빨리 경전에서 확인하시고, 삼장과 그 주석서에 따라서 현재의 수행자들에게 가장 알맞다고 생각되는 너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형태의 마음을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을 만드셨다. 그렇지만 마음을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이 중요하다고 말해지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세 가지는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즉 몸․느낌․법을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라임 쥬스에 설탕, 소금, 물의 첨가물들이 함유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의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隨觀)을 행할 때 비록 처음의 것만큼 두드러지지 않지만 나머지 셋 역시 포함되는 것이다.



․심념처의 방법


돌아가신 大德(Mahā thera) 모곡 큰 스님은 너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을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心隨觀)을 만드셨고, 이것은 오늘날 좀 더 실질적으로 수행을 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쉽게 적용할 수 있고 적절한 것이다.

다음의 13종류의 마음(citta) 혹은 의식(viññāṇa)는 숙고되야만 할 대상이다. 그러나 이 13종류가 동시에 숙고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찰나에 단지 하나의 마음이 그것이 일어날 때 숙고 혹은 관찰되어야 한다. 한 찰나(순간)에 하나의 의식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aññam uppajjati citam, aññam cittam nirujjati, 이 마음이 소멸하고 저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은 한 의식이 소멸하고 다른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서는 많은 종류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믿어진다. 아마도 1000 혹은 2000종류의 마음이 될 것이지만 모곡 큰 스님에 의해서 단지 13종류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1. 눈의 의식(眼識)

2. 귀의 의식(耳識)

3. 코의 의식(鼻識)

4. 혀의 의식(舌識)

5. 몸의 의식(身識)


외부에서 방문하는 의식(external visiting consciousness)이다.


6. 탐욕이 있는 마음(貪心)

7. 분노가 있는 마음(瞋心)

8.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癡心)

9. 탐욕이 없는 마음(無貪心)

10. 분노가 없는 마음(無瞋心)

11. 마음의 의식(意識)


내부에서 방문하는 의식(internal visiting consciousness)이다


12. 들숨의 의식

13. 날숨의 의식

이 둘을 주인인 의식(host consciousness)라고 부른다.


위의 13종류의 마음은 범부에 속하는 모든 마음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의식이 일어날지라도 이것은 단지 대상(所緣; ārammaṇa)과 감각의 문(門; dvāra)의 충돌로 인한 것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또한 이러한 여섯 감각의 문을 통해서만 의식이 일어날 수 있고, 마음(citta)은 이 여섯 감각의 문 밖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마음(citta)과 느낌(vedanā)은 함께 일어나는 법(俱生法; sahajāta dhamma)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게다가 느낌과 지각(想; saññā)은 마음의 형성작용(cittasankhāra, 즉 심소)이다.

정신적 현상의 모임(nāmakkhandha; 느낌, 지각, 형성작용, 인식작용(=의식)의 모임)들을 숙고할 때, 물질적 현상의 모임(色蘊; rūpakkhandha)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임들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존재하고 함께 소멸하는 현상, 즉 함께 이끌리는 법들(相應法; sampayutta-dhamma)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모임을 숙고한다면 다른 나머지 모임들을 숙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이 가장 두드러지고 뚜렷한 현상이기 때문에, 마음을 따라 가면서 보는 관찰(心隨觀)이라고 한다.


․12 연기와 실제수행이 결합된 예


1. 이와 같이 모임이 단지 일어나고 사라짐뿐이라는 통찰을 얻은 수행자에게는 어떠한 이익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대답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 탐욕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수행자는 그 탐욕의 마음은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으며 단지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탐욕의 마음이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12 연기(緣起)의 연속이 그 중간에서 단절되는 것으로 즉 탐욕의 마음을 죽이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탐욕의 마음에 대한 숙고가 없다면, 불가피하게 집착(upādāna)이 뒤따르고 연이어서 업의 생성(kammabhava)이 나올 것이다. 업의 생성이 일어날 때면 태어남(jāti)이 뒤따르게 된다. 태어남이 얻어질 때 이것은 고통을 획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12 연기(緣起)는 계속해서 회전하게 된다. 이처럼 끊임없이 윤회의 과정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숙고 즉 무상(anicca)의 수행은 윤회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윤회라는 바퀴의 살을 부수는 것이다. 이것은 12 연기(緣起)의 고리들과 연결을 자르는 것이고, 무명(avijjā)을 근절하고 다섯 모임(五蘊)의 일어남(udaya)과 사라짐(vaya)을 숙고함으로써 통찰 즉 밝음(明; vijjā)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다섯 모임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고통이라는 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위빠사나 통찰에 의해서 지각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꿰뚫는 통찰(penetrative insight)이 얻어질 때, 밝음(vijjā)이 나타나고 무명(avijjā)이 사라진다.



2. 수행자는 느낌을 관찰할 때 항상 12 연기(緣起)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자는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만약 수행자가 그 느낌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숙고하지 못한다면, 불가피하게 그 느낌에 대한 갈애가 뒤따를 것이다. 갈애가 일어날 때 또한 집착이 그 뒤를 따를 것이고, 다시 이것은 업의 생성을 일으키고, 그 결과로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등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12 연기(緣起)의 모든 고리가 연결되어 끊임없이 회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간에서 12 연기(緣起)가 시작되는 것이다.

반대로 만약 수행자가 이 즐거운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고 숙고했다면, 이 느낌에 대한 갈애는 일어날 수 없고, 이 갈애가 없다면 집착도 없고, 집착이 없다면 업의 생성도 따라서 태어남, 늙음 죽음등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12 연기(緣起)의 고리는 중간에서 잘려지는 것이다.


․ 수념처의 방법


모곡 큰 스님은 수행자를 위하여 쉬운 방법의 느낌을 따라가면서 보는 관찰을 고안하셨고 이것은 다음과 같다.


1. 외부의 여섯 방문자;

 ① 눈의 바탕(眼處)에서 일어나는 평정한 느낌

 ② 귀의 바탕(耳處)에서 일어나는 평정한 느낌

 ③ 코의 바탕(鼻處)에서 일어나는 평정한 느낌

 ④ 혀의 바탕(舌處)에서 일어나는 평정한 느낌

 ⑤ 몸의 바탕(身處)에서 일어나는 줄거운 느낌

 ⑥ 몸의 바탕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


2.  내부의 세 방문자;

 ① 마음의 바탕(意處)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느낌

 ② 마음의 바탕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느낌

 ③ 마음의 바탕에서 일어나는 평정한 느낌

 

3. 세 주인인 느낌;

 ① 기쁨 혹은 즐거움의 경우에서 유쾌한 느낌과 함께 하는 들숨과 날숨

 ② 불쾌, 고통, 절망의 경우에서 불쾌한 느낌과 함께 하는 들숨과 날숨

 ③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경우에서 평정한 느낌과 함께 하는 들숨과 날숨


느낌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곳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이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가슴 혹은 머리에 의식을 두어 관찰하지만, 느낌은 적절한 때에 몸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수행이 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잘못된 목표를 향해 활을 겨누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느낌과 계약을 맺어서 느낌을 어느 특정한 장소에 고정시킬 수는 없다. 이러한 느낌은 접촉이 선행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수행자가 지금 찰나에 관찰하고 있는 느낌이 그 다음찰나에도 동일한 것이라고 보고 믿는다면, 그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사람이다


                                              ; 발췌번역; 이 영진(tatpum@hanmail.net)


     [이 게시물은 마을지기님에 의해 2006-10-26 17:12:49 수행에 도움이 되는 글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