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위빠사나란? > 위빠사나 수행지침서
 
   
  마음 챙김에 대한 질의응답 50가지
  글쓴이 : 마을지기     날짜 : 06-12-10 10:57     조회 : 8479     추천 : 0    
  트랙백 주소 : http://www.vmcwv.org/bbs/tb.php/menu2_1/22

마음 챙김에 대한 질의응답 50가지



  수행 중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수행의 깊이와 수행자의 기질, 취향, 업, 의식 수준, 그리고 그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관찰 초점이 달라진다. 또한 미얀마의 마하시, 쉐우민, 참매, 모곡 센터와 티베트에서 보는 관점에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수행자의 증상에 따라 유효적절한 처방전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지나친 염려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유사성을 정리해보았다.

  이 장이 당신의 수행길을 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고 듣고 느껴서 안 만큼밖에 쓸 수 없음이 사뭇 안타깝다. 그래도 거듭 읽어보면 양분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대기설법(對機說法)이어서 질문자에 따라 대답이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다른 답 속에서도 공통분모가 보일 것이고. “어떻게 수행할까?”를 곰곰이 사유하지 말고, 왜 수행하는지 수행 목표를 잊지 말고 보리심(bodhi-citta)도 챙기면서 하자.


Q 4념처(四念處 satipaṭṭhāna)의 대상인 몸, 느낌, 마음, 법 중에서 당신은 무엇을 대상으로 관찰하려는가?

A 처음엔 호흡을 관찰하다가 집중력이 생기면 몸 전체에서

  ① 정신이 산만하고 식욕이 강하며 이성을 갈망하는 이는 몸(kaya)을,

  ② 동작이 날쌔고 의심이 많은 이는 느낌(vedanā)을,

  ③ ‘나’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지닌 이는 마음(citta)을,

  ④ 관찰이 예리한 이는 법(dhamma)

  대상으로 관찰한다. 우리가 호흡을 알아차리면 그 느낌에서 마음도 덩달아 챙겨지면서 인과 작용까지 분명히 알게 된다. 즉, 몸·느낌·마음·법은 함께 동시에 있는 그대로 관찰되는 순간, 우리의 어둠을 밝혀줄 것이다. 당신이 뭘 대상으로 하든 일어나고 사라지는 데서 삼법인(三法印: 無常·苦·無我)를 분명히 보면, 지혜가 빛을 발해서 어둠이 싹 걷힌다.


Q 무명(無明 avijjā)을 밝히려면 어떻게 관찰할까?

A 관찰 대상이 변하려는 기미를 알아채고(卽觀) 변하는 과정을 보이는 대로 주시하되(隨觀), 샅샅이 꿰뚫어본다(直觀). 그리 몸소 체험하면 본래 모습이 보여서 진리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래서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확실히 알게 되면, 확고한 믿음이 자리잡는다. 옳고 그름을 혼동할 때 우리는 악행을 하게 되나, 사성제를 모르는 결과 생겨난 사견으로 인해 혼돈스런 상태인 어리석음(moha) 역시 의도 없이 바라볼 때 있는 그대로 보인다.


Q 미리 지식을 습득한 후에 수행하면 마음이 의도하는 대로 현상이 나타날까?

A 그렇다. 그러나 당신이 의도 없이 자연스레 지속적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 보일 것이다. 수행 과정과 목표를 분명히 이해해서 수행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더라도, 체험이 깊어지면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보는 게 당신 수행에 도움이 될 거고.


Q 왜 현상이 생길까?

A 그걸 알고 싶으면 관념적으로 머리 굴리지 말고 직접 관찰해보라. 몸과 마음의 본성을 지식으로 알면 현상이 이어진다. 무(無)에서 온갖 현상이 모습을 나타냈다가 미처 그 의미를 깨닫기 전에 없어지더라도 대상화시켜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편견 없이 바라보고 비추어보아 완전히 알 때, 의문은 끝난다.


Q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A 있는 그대로 못 봐서, 내가 화를 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Q 탐심이 일어날 때는?

A 내면에서 그걸 부추기는 마음과 울렁거리는 느낌의 변화 등을 면밀히 살핀다. 삶의 본능인 생존욕이 무의식에서 앞장서면 본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탐심 속을 마음의 눈을 뜨고서 한낮의 밝은 태양 아래를 거닐듯이 앞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고 똑바로 걸어가면, 탐심이 지혜로 전환된다.


Q 탐심(貪心)과 진심(嗔心)이 함께 일어날 때는?

A 나에겐 아이가 한밤중에 막무가내로 울 때, 잘 키우고 싶은 본능적인 애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경험이 있다. 이렇게 어리석음(moha)으로 인해 나와 너의 구분이 없음을 바로 알지 못해서 탐심(lobha)이 일어나고, 그 순간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진심(dosa)이 인다. 그리고 진심이 일 때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moha), 대상에 집착하거나(lobha) 대상을 피하려(dosa) 한다. 이렇게 탐·진·치는 붙어 있어서 나란히 불어난다. 그러나 괴로움의 근원인 삼독심이 일어날 때 얼른 알아차려서 조용히 지켜보며 어떻게 하려는 의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게 실체가 없고 조건 따라 변하는 것임을 알게 되어서, 절로 평등심이 유지된다.


Q 어떻게 하면 아만(我慢 mana)을 버릴 수 있을까?

A 파리 한 마리가 차바퀴 위에 앉아서 “나는 얼마나 많은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솝우화처럼 우리는 뭔가 굴러가는 일에 조금이라도 관여했을 때 자기가 그걸 이루어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오온이 내가 아님을 있는 그대로 보아서 분명히 알면, 개미떼처럼 무리지어 움직일 때도 에고에서 비롯된 우월감은 그 흔적도 없다. 당신이 세속을 등지고도 허명(虛名)을 놓지 못하면 비린내를 맡고 파리떼가 다시 모여든다. 당신이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자기를 발견한다면 세상(오온)은 멈출 것이다.


Q 몸이 아파도 마음은 아프지 않으려면?

A 오온을 내 거라고 애착하지 않으면 겉병은 절로 낫는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피할 수 없으나 우비고뇌(憂悲苦惱)는 피할 수 있다. 그러다가 오온이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걸 분명히 보는 순간 생사 없는 열반에 이른다.


Q 무엇이 느낌(vedanā)을 일으키나?

A 접촉이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느낌은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苦)다.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변해서 실체가 없음을 알수록 거기에 맹목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나, 그냥 놔두면 새로운 느낌을 유발시킨다. 왜냐하면 즐거운 느낌에는 탐심이, 괴로운 느낌에는 진심이,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는 치심(癡心)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몸의 고통이 극심할 때 그걸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육체적 고통에다 정신적 고통까지 곁들여서 연달아 두 개의 화살을 맞는 셈이다. 통증이 심한 경우에 그걸 잊으려 좋아하는 음식을 마구 먹거나 취미생활에 심취하는 것도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고통스러울 때 평등심을 유지하면서 마음 챙김(sati)과 분명한 앎(sampajaññā)으로 비추어보면, 정신적 고통은 없다. 그때 조심스레 거듭 마음을 챙기면 육체적 고통도 사라진다.


Q 좌선 중 고통스러우면 어떻게 할까?

A ① 고통은 원래 없다. ‘내 몸’이라는 집착으로 인해 마음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나’와 분리해서, 그건 인과의 작용이라는 바른 앎으로 집착 없이 지켜본다.

  ② 고통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분리한다. 그리고 느낌과 마음도 분리해서, 괴로운 느낌을 아는 마음을 비추어본다.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 그걸 싫어하는 마음, 불편해서 불안한 마음, 못 견뎌서 짜증내는 마음, 괴롭다고 분별하는 마음 등을 두루 알아차려서 챙긴다.

  ③ 고통에 저항하면 긴장되어서 고통이 더 심해진다.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되, 느낌의 원인인 촉(觸)이 무상하므로 그 결과인 느낌(受) 역시 무상함을 관찰한다.

  ④ 통증의 느낌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범위를 될 수 있는 한 좁혀서 돋보기로 들여다보듯이 세밀히 살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모아져서, 관찰하는 힘에 의해 통증이 서서히 바뀐다.

  ⑤ 가장 강한 통증의 부위로 주시를 옮겨서 숨을 들이쉴 땐 통증 깊숙이 마음의 힘이 침투하여 통증이 산산이 부서지는 걸, 숨을 내쉴 땐 호흡의 경로를 통해 그 부서진 입자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보이는 대로 관찰해보라.

  ⑥ 고통스러운 곳에 마음을 밀착시키다 보면 일순간 일체감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건 완전히 일치된 게 아니므로 바르게 겨냥해서 느낌과 느낌 사이사이를 꿰뚫어보라. 아픔은 반드시 사라진다.

  ⑦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성장케 한다. 고통은 극에 달하는 순간 소멸되므로, 고통과 싸우지 말고 줄다리기에서 힘써 버티듯이 단호히 참아내라. 그러면 고통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져다준다.

  ⑧ 고통이 심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참다가 진심(嗔心)을 일으키지 말고 자세를 살짝 바꾼다. 그 때도 몸의 자세를 바꾸고 싶은 충동을 알아채서 왜 바꾸려는지 그 동기를 알고 나서 자세를 바꾸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알아차리면서 바꾼다.

  ⑨ 바로 그 순간에서 비켜 있을 때 고통이 의식된다. 중심 밖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되더라도 수치심으로 자책하지 말고 오직 순간만을 직시하되,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마라.

  ⑩ 고통은 절로 일어나서 저절로 사라진다. 통증을 무시한 채 오직 호흡만 주시하라.


Q 좌선 중 바깥 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고 안 들리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A 처음 좌선을 시작할 때는 소리에 마음이 이끌리지만, 집중할수록 소리가 스스로 다가와서 밀착되어 아주 작은 소리도 실제보다 더 크게 들린다. 집중하면 소리가 더 커지는 것은 업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 관찰되다가 깊은 삼매에 드는 순간, 아는 대상 하나에만 마음이 모아져서 바깥 소리는 완전히 차단된다. 그러면 천둥소리는 물론 벼락 치는 소리도 안 들린다.


Q 좌선 중 빛이 보인다?

A ① 그것은 한순간 명멸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현상이 싫어서 혐오하여 없애려는 마음이나 좋아서 애착하여 유지하려는 마음이 없는지 얼른 알아차린다.

  ② 마음이 만든 영상(心象 nimitta)이다.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진 않으므로, 오직 변화만 보라.

  ③ 빛의 입자(kalapa)가 생멸하는 틈새에서 그 원인인 무의식을 꿰뚫어보라. 그러면 빛의 입자 하나하나의 에너지는 조금도 줄지 않고 지혜로 전환된다.

  ④ 깔라빠는 관념적이지 궁극적 실재는 아니다. 이 관념을 꿰뚫어봐야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 관념적 실재(pannati)를 내려놓고 궁극적 실재(paramatha)를 보라. 고요하게 가라앉은 마음이 대상을 바르게 포착하지 못했을 때는 시각적인 이미지가 생긴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정확히 겨냥하면, 환영은 사라진다. 마음의 거울에 비친 실상을 한순간도 놓치지 마라.

  ⑤ 그래도 빛이 사라지지 않으면, 거듭 마음을 챙기면서 호흡에 집중하라.

  ⑥ 찰나 사고방식의 전환이나 대상과의 합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화를 감상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Q 빤냐띠(paññatti)와 빠라마타(paramatha)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A 빠라마타는 오온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본 실상이고, 빤냐띠는 오온을 자의식인 알음알이로 반야 없이 본 허상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기 전에 상상으로 맛을 아는 게 빤냐띠, 직접 맛을 보는 게 빠라마타이다. 경행할 때 발의 느낌을 체험 없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해 이미지화한 환상이 빤냐띠, 4대 요소의 변화를 직접 느낀 사실이 빠라마타이다. 망상할 때 분별심이 스토리를 지어내는 의식의 유희가 빤냐띠이며, 망상 중에도 찰나찰나 무상·고·무아가 보인 진상(眞相)이 빠라마타이다. 빠라마타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스스로 있는 자연스런 모습인 반면, 빤냐띠는 꿈으로 실제 없는 허깨비와 같은 가상(假相)이다. 그러나 빠라마타도 개념인 빤냐띠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며, 인식(想 saññā)은 습관적으로 작용하여 현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의도가 끼어들면 무의식이 의식화되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면 이미지가 된다. 그러므로 바싹 붙어서 관찰하지 않으면 에고에 기반을 둔 사념이 확산된다. 이렇게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할 뿐이다. 그렇지만 헛것을 헛것으로 알면 거기에서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때 한번 허상과 실상의 상호 의존성을 살펴보라. 허(虛)와 실(實)은 서로 통한다.


Q 실상(實相)을 보는 순간은?

A ① 좌선할 때는 고통 없는 느낌만 느껴지고 상념이 약해져서 앉아 있음도 의식되지 않는다. 경행할 때도 걷고 있다는 생각 없이 맨 느낌만 느껴져서 사유가 깃들 틈이 없다. 그러다가 언어와 사고(思考)와 시간이 완전히 멈추면 느낌에서 풀려나 모든 걸 스스로 비추는 거울이 된다.

  ② 눈동자가 눈동자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깨어 있음도 의식되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만 존재하는 무지의 극치이다. 그래도 각성은 여전하다.

  ③ 감정을 직접 느끼는 순간 그것의 모순이 보여서, 절로 그 감정이 지혜로 전환된다.


Q 관찰할 때 명칭을 붙이기가 힘들다. 그리고 체험을 말로 설명하지 못하겠다?

A 갓난아기였을 때는 모유를 먹이다가 치아가 돋아나면 이유식을 시작하여 젖을 떼듯이, 주시가 익숙해지면 명칭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테크닉은 장난감과 같아서 아이가 성장하면 장난감은 버리게 마련이고,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서 명칭을 붙이는 순간 명칭 붙인 현상은 이미 달아나고 없다. 만약 당신이 명칭을 붙인다면, 그 의미가 한계를 그어버려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명칭을 안 붙이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한꺼번에 선명히 다가온다. 그때 그 순간의 앎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서, 굳이 명칭 붙인다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으로 명칭 붙일 수밖에…. 그러다가 만물이 본래 명칭이 없음을 알게 된다. 언어 너머에 있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때는, 체험하고 있다는 의식 자체마저 체험과 체험자를 나누는 행위이므로 그냥 바라보고 비추어보기만 하라.


Q 망상이 일어나면 어떻게 관찰할까?

A ① 노력(viriya)이 약해질 때 망상이 생긴다. 그러므로 악업을 과감히 버리고 선업을 일으켜서 유지하면서 더욱 키우려고 의욕적으로 애쓴다.

  ② 심상(心想)인 망상과 그 대상은 둘 다 영원한 실체가 없는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즉시 알아차려서 거기에 갈애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진다.

  ③ 망상에 빠져드는 순간 얼른 알아차려서, ‘아는 마음’이 이를 일깨워주게 한다. 방일하지 않으면 그 낌새가 감지된다. 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전에 얼른 알아차리도록 하라. 

  ④ 항상 심리 상태를 살펴서 망상을 즐기고 있는 마음이나 망상 그 자체를 혐오하는 마음에 습관적으로 이끌리지 말고, 망상을 부정하거나 지우려고도 말고, 그걸 분석하거나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저울질함 없이 자연스레 바라본다. 망상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므로 마음가짐만 바르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⑤ 망상하는 게 옳은지 순간 지혜롭게 주시해서 그 과정을 이해할 때, 망상은 사라진다. 

  ⑥ 그래도 망상이 지속될 땐 망상을 수행 대상으로 삼아서, 망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알아낸다. 거의 망상하는 자신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망상이 이어지지만, 망상하는 이는 내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온을 ‘나’로 착각해서 자아의식을 놓지 못한다.

  ⑦ 가슴 속에서 망상에 따른 느낌이 변하는 것을 약간 의심을 가지고 그 느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라.

  ⑧ 망상과 망상 사이사이에서 정적이 발견되면 어떤 망상이든 끊긴다. 그러나 마음 챙기는 힘이 약하면 끊어졌던 망상이 되살아나므로, 사라지는 끝을 반드시 확인하라.

  ⑨ 망상의 결과를 살짝 엿본다. 한 시간 내내 망상만 해보면 얼마나 심신이 힘들고 해로운지 깨닫게 돼서 망상이 일자마자 끊게 될 것이다.

  ⑩ 수행 주제를 바꾸어서, 수식관(數息觀)으로 집중을 강화한다. 호흡을 강하게 빨리 하거나 숨을 들이쉬고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멈추어서, 몸의 힘으로 극복해보라. 그러나 당신에게 망상을 없애려는 마음이 있을 땐, 그 본성을 놓치게 된다.

  ⑪ 존재하지도 않는 망상과 씨름하지 말고 불성(佛性)을 항상 잊지 마라. 불성을 아는 이는 언제나 있다.

  ⑫ 오직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으면 과거나 미래는 끼어들지 못한다. 진리의 길에서 일순간도 이탈하지 마라.

  ⑬ 생각들에 먹이를 주는 일을 관두고, 거기에 관심을 갖는 걸 멈추라.

  ⑭ 망상을 한번 발보리심인 대비원력(大悲願力)으로 변환해보라.

  ⑮ 같은 상념이 여러 번 반복되면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내시경으로 활용해서, 그 근본 원인을 찾아보자.


Q 집착의 대상과 관련된 기억과 의도가 일어날 때는 얼른 알아차려서 없애는데, 올바른 태도인가?

A 아니다. 이미 일어난 번뇌는 얼른 알아차리되, 빈틈없이 꿰뚫어봐서 그 뿌리를 캐내야 한다.


Q 욕망을 바탕으로 욕망을 버릴 수 있을까?

A 진리를 알려는 마음이 있으면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알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진리와 영영 멀어진다. 욕망을 쫓던 발길을 멈추고 진리로 눈길을 돌려서, 욕망을 버리려는 소망을 계속 키워라. 욕망이 강할수록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갈망 역시 간절하다. 의지로써 몸이 제어되는 순간 깨어 있으면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이 늘어난 만큼 감각적 욕망은 줄어들어서, 어언 한밤이 지나면서부터 업력(業力)이 원력(願力)으로 바뀌며 알몸뚱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다 여명이 밝아오면 이어 태양이 떠오르듯이, 정견이 서면 팔정도가 절로 굴러가서 해탈하게 된다.


Q 몸이 사라지는 건 보이는데, 마음이 사라지는 건 뵈지 않는다?

A ① 당신은 아직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불확실한 현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가운데도 불변이 있고 그 속에서 또 변화를 아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꼭 보라.

  ② 가슴의 느낌에서 미묘한 의식의 흐름을 찾아서 관찰하라.


Q 좌선 중 관찰 대상이 없어졌다?

A ① 얼른 알아차리되, 거듭 마음 챙겨서 노력을 배가하라. 마음 챙김(sati)에 노력(viriya)을 더하면 관찰하는 힘이 예리해진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허둥대면 못찾지만 마음을 가라앉혀서 기억을 되살리면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나듯이, 주의 깊고 예리하게 평등심으로 가만히 지켜보면 대상은 곧 나타난다. 빤냐띠에 초점을 두니까 대상을 놓쳐서 없어진 걸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 순간 빠라마타를 챙기면 관찰 대상은 사멸하지 않는다.

  ② 지혜의 힘이 작용하면 현상은 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거친 현상은 사라졌지만 미세한 현상은 남아있을 것이다. 그 미미한 변화를 알아차려라.

  ③ 심리 상태를 챙겨서 당황하는 마음, 들뜬 마음, 불안한 마음 등이 있으면 있는 줄 분명히 안다.

  ④ 그 순간 느껴지는 엉덩이가 바닥에 닿아 있는 느낌이나, 손등이 무릎 위에 닿은 느낌의 변화를 관찰한다.

  ⑤ ‘아는 마음을 아는 놈은 누구인가?’ 라는 의심을 가지고 거꾸로 들어간다. 강한 의심을 가지고 아는 마음 자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아는 마음과 하나가 되면서 활짝 깬 마음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