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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빈 설법 1 : 법(法)이란 무엇인가
  글쓴이 : 마을지기     날짜 : 10-07-01 09:28     조회 : 5648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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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 dhamma)이란 무엇인가

 

 호두마을에서 <프리 위빠싸나(pre-vipassana)>를 지도하는 작가 김정빈입니다.

 

 프리 위빠싸나는 ‘전(前) 위빠싸나’라는 뜻으로서,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분, 또는 수행을 오래 해왔으나 명상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신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이를 위해 프리 위빠싸나에서는 초심자들이 불법과 명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설법 시간을 늘이긴 했지만 2박 3일의 일정을 감안할 때 설법 기회를 4회 이상 제공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호두마을 홈페이지를 통해 설법을 행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여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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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명상을 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법(法, dhammma)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법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셨고, 남방 불교의 경전으로 남아 있는 빠알리어(Pali 語)의 담마(dhammma)를 중국어로 옮긴 말입니다.

 

 인도에서 불교는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Sanskrit 語)를 사용하여 전해졌는데, 빠알리어 경전이 산스크리트어 경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서 부처님의 친설(親說)에 가깝습니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은 주로 대승경전인데, 당시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는 서울말, 또는 고전 언어인데 비해 빠알리어는 우리로 치면 강원도 사투리쯤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주로 인도의 동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펴셨기 때문에 그 지방 언어인 빠알리어를 사용하신 것으로 보이며, 이 언어로 된 경전이 지금 가장 많은 분량으로,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를 후대인들이 산스크리트어로 일부 옮겼고, 또 새로이 나타난 대승경전 또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습니다. 예를 들어 <금강경(金剛經)>의 산스크리트어 본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 간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법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는 담마(dhammma)이고, 산스크리트어는 다르마(dharmmma)이며, 열반(涅槃)의 경우는 각각 닙바나(nibbana)와 니르바나(nirvana)입니다. 이에서 보듯이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발음이 있는데 비해 빠알리어에서는 그것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빠알리어는 더 담백한 느낌을 줍니다.

 

 불교 명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법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까닭은 부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법이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불교라’고 불리우는 종교(철학)는 사실 불교라는 말보다는 불법(佛法), 또는 그냥 법(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불교라는 말 또한 예전부터 쓰여온 것이긴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보다 더 많이 법이라는 말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법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위빠사나 수행가이드>에 올라 있는(<불교 교학의 장>) 각묵 스님의 설명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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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불교는 법(法)을 중심으로 하는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법의 원어는 산스끄리뜨로는 다르마(dharma)이고 빠알리로는 담마(dhamma)입니다. 중국에서는 법(法)으로 번역이 되었고 달마(達磨)로 음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법, 다르마, 담마, 달마가 지금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르마는 √dhr(to hold)에서 파생된 명사로 세상을 지탱하는 원리나 법칙을 뜻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제문헌에는 ‘정의, 의무, 법률, 법칙, 도덕, 선(善), 종교’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중국에서도 법(法)이라고 옮겼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단어가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초기경들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술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초기경의 주석서들은 법(dhamma)의 의미를 크게

 

 ① 빠리얏띠(pariyatti, 교학, 가르침)

 ② 헤뚜(hetu, 원인)

 ③ 구나(guna, 덕스러운 행위)

 ④ 닛삿따닛지와따(nissatta-nijjivata, 개념이 아닌 것)

 

 등 넷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크게 둘로 나누어 정리가 되는데

 

 ⑴ 부처님 가르침(=진리=덕행)으로서의 법과

 ⑵ 정신적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법(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을 주석서에서는 불법(佛法, Buddha-dhamma)이라 부르고, 정신적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법을 일체법(一切法, 諸法, sabbe dhamma)이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일체법으로 정리가 되기 때문에 ‘일체법이 곧 불법(一切法 皆是佛法)’이라고 〈금강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런 두 가지로 정리되는 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추구하는 교학 체계를 아비담마(Abhidhamma)라 하는데 ‘법(dhamma)에 대해서(abhi)’라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대법(對法)으로 옮겼고, 법을 체계화한 궁극적이고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승법(勝法)이라고도 옮겼습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이러한 법을 4위 82법으로 정리하고,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5위 75법으로 이해하였으며, 대승 아비달마로 불린 유식에서는 5위 100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자신의 본성(사바와, sabhava, 고유의 성질, 自性)을 지니고 있는 것을 법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탐욕과 성냄이 서로 다른 법인 이유는 대상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가진 탐욕과 대상을 밀쳐내는 성질을 가진 성냄의 성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82법, 75법, 100법으로 분류되는 법들이 모두 서로 다른 고유성질(自相)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든 법들(諸法)은 무상이고 고고 무아라는 보편적인 성질(共相)을 가집니다.

 

 불교 2600년사는 실로 ‘법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대승에서는 법공(法空), 법상(法相), 법성(法性)의 관점에서 공종(空宗: 중관 계열), 상종(相宗: 유식 계열), 성종(性宗: 여래장 계열)이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법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법이야 말로 해탈 · 열반을 성취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법의 무상 · 고 · 무아를 통찰하는 것을 위빳사나(觀)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제법의 보편적 성질인 무상 · 고 · 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결코 해탈 · 열반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셨고 ‘법을 의지처로 삼고(法歸依) 법을 등불로 삼아라(法燈明)’고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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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이 초기 불전을 연구해오신 각묵 스님의 설명입니다만, 저는 프리 위빠싸나를 수행하시는 초심자를 위해 좀더 쉽게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다만, 이는 저 나름의 설명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 설명만을 의지해서는 안 되며, 추후에 보다 정밀한 이해를 해나가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각묵 스님의 설명에서도 보듯이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하고, 일체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순서는 어느 것이 먼저일까요?

 당연하게도 일체법이 먼저이고, 부처님은 이미 있었던 그것을 후에 깨달아 펴셨습니다.

 

 이때 전자를 여법(如法), 후자를 교법(敎法)이라 불러 보겠습니다.

 왜 전자를 여법이라고 불렀느냐 하면, 전자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 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것)를 여(如)라고 불러 왔습니다. 부처님의 별호 가운데 하나가 여래(如來)인데, 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법과 교법의 관계는 빛과 무지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먼저 빛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색투명한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빛을 보셨습니다. 그런 다음 이 빛을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중생에게 보여주셔야 했는데, 부처님의 설법은 이를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처님의 설법은 프리즘에 비유됩니다. 즉, 부처님께서 빛에 프리즘을 갖다 대자 무지개가 떴습니다. 그럼으로써 중생도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무지개가 바로 교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부처님께서는 어느 때 싱사파 숲에서 나뭇잎을 한 줌 손에 쥐시고서 “내가 깨달은 법은 이 숲의 나뭇잎처럼 많지만 나는 나의 이것만을 설하노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여법에 비해 교법의 양이 매우 적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법과 교법은 일면 같으면서도 일면은 다릅니다.

 

 이중 가장 큰 상이점은 여법은 개념을 초월하지만 교법은 개념에 의거하여 설해진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대승경전에서는 경전(부처님의 말씀, 또는 가르침, 즉 교법)을 초월할 것울 강조하기도 하고(예를 들면 <유마경>), 후대 중국의 선사들 또한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 즉 개념을 세우지 않음)와 교외별전(敎外別傳: 경전 밖에 따로이 전함)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강조는 절반만 유효합니다.

 여법이 개념을 초월한다는 것, 오직 깨달은 이들만이 보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 점만을 강조하게 되면 중생은 그저 암담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어쩌라는 말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부처님의 위대함, 선사님들의 위대함만을 예찬하며 가만히 있어야만 합니까?

사실 교법은 그 때문에 설해진 것입니다.

 

 바꿔 말하여, 교법은 비록 개념을 바탕으로 설해진, 경험의 면에서 보면 빈 껍데기 같은 것이지만, 그 안에는 여법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 즉 길(道,: 도, magga)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서울로 가려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지도와 같습니다. 물론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들을 아직 서울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도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보면 언젠가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고, 그때 우리 또한 서울, 즉 깨달음 해탈 열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법의 초월성만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열반은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열반에 이르는 길은 분명히 있다.”는 말을 병립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성제(四聖諦)에 대입하여 생각해 볼 때, 전자는 멸성제(滅聖諦)에 해당되고, 후자는 도성체(道聖諦)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도성제, 즉 팔정도(八正道)를 성실하게 닦아 나감으로써 멸성제, 즉 깨달음, 해탈 열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물론 ‘얻는다.’는 말은 멸성제적 관점에서는 할 수 없는, 오직 중생의 개념 세계에서의 언어로서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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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여법과 교법의 이해를 바탕으로 저는 법을 다음처럼 순서에 따라 법1, 법2, 법3… 등으로 배열해 보았습니다.

 

 법1 우주 그 자체(시공간을 모두 포함하여)

 법2 법1을 움직이는 원리, 법칙 = 과학

 법3 법2 중에서 인간에 관련된 것 = 인문 과학

 법4 법3 중에서 ‘고(苦)와 그 지멸(止滅: 그쳐서 소멸시킴)’에 관한 것 = 불법(여법)

 

 법4에 쓰인 ‘고와 그 지멸’이라는 말은 중부경(맛지마 니까야)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에 바탕 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사성제의 다른 표현입니다. 고와 그 지멸이라는 두 항목에 대하여 고에 대하여 원인인 집(集)을, 지멸에 대해 그 방법인 도(道)를 말씀하심으로써 네 항목으로 증편한 것이 사성제이기 때문입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사성제의 출발은 고(苦, dukha)입니다. 이때 고는 괴롭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받는 느낌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셨는데, 그중 대표적인 분류법이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중간 느낌 등 세 가지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이를 시소(어린이들의 놀이 기구)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그 경우 세 느낌은 다음과 같이 배열됩니다.

 

 

      고(苦)                불고불낙(不苦不樂)           낙(樂)

 (괴로운 느낌)                (중간 느낌)             (즐거운 느낌)

           ★ -------------------------- ○ ------------------------ ☆

         △

 

* 불고불낙을 사(捨)라고도 하며 이를 총칭하여 고락사(苦樂捨) 삼수(三受)라고 합니다. 이때의 수(受)는 받아들임, 즉 느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세 가지 느낌을 총칭하면 어떤 느낌이 될까요? 그것이 또한 고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고는 괴로우니까 고이고, 낙은 영원하지 않아서 고이며, 불고불낙 또한 언젠가는 고와 낙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고인 것입니다.

 

 언젠가 파세나디 왕이 부처님에게 “인생에는 즐거움도 많은데 부처님께서는 왜 인생을 고라고 하시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파세나디 왕이 사랑하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그가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왕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렇다면 그가 아프거나 죽는다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중생은 사랑하는 사람(것)에게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법은 본질적으로 무상(無常: 덧없음)하기 때문에 사랑이든 미움이든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배신을 할 수도 있고, 아프거나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 지금까지 누렸던 즐거움은 순식간에 고통으로 변합니다.

 

 이때 중생이 느끼는 고통은 그가 지금까지 누렸던 즐거움의 무게와 완전하게 같습니다. 사랑이 지극하여 즐거움이 컸으면 큰 만큼, 그렇지 않아서 즐거움이 적었으면 적은 만큼 고통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앞에서 본 시소가 즐거움 쪽으로 쏠렸다가(내려갔다가) 무상의 법에 의해 반대편인 괴로움 쪽을 쏠렸음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고와 불고불낙과 낙을 포함하여 중생이 느끼는 모든 느낌의 바탕은 고라는 것을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사성제의 출발점인 고는 이런 의미의 고입니다. 중생은 이 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저는 시소의 한쪽 편에서의 고를 그냥 라고 부르고, 고와 불고불낙과 낙을 포함하여 모든 느낌이 고라는 의미에서 고를 고′(고 대쉬)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졸저 <근본불교의 가르침>, 불광 출판부).

 

 바로 이 고′에 대응하는 낙′가 바로 열반입니다. 그런데 열반은 고와 낙이 아닌 중간에서 생깁니다(이로써 부처님께서 왜 “사랑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중간을 불고불낙, 또는 사라고 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는데요, 이를 빠알리어로는 우뻬카(upekha)라고 합니다.

 

 앞에서 고에 고와 고′가 있었던 것처럼 우뻬카 또한 사와 사′가 있습니다. 그냥 사는 중생으로서의 중간 느낌, 즉 무덤덤한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로서의 사, 또는 열반으로서의 사가 있습니다. 이 느낌은 고와 낙 사이를 왕래하지 않는 평등한 느낌이라는 점에서는 중생의 중간 느낌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중생의 이 이 느낌에는 지극한 고요함(寂寂: 적적)과 맑고 초롱한 알아차림(惺惺: 성성)이 없는데 비해 깨달은 분의 사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이중 적적을 위해 사마타(samatha) 명상이 수행되고, 성성을 위해 위빠싸나(vipassana)다. 그러나 좀더 깊이 고찰해 보면 위빠싸나 명상에는 적적과 성성이 함께 존재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집중을 중심으로 합니다. 이에 비해 위빠싸나 수행은 집중과 함께 알아차림이라는 또다른 정신적 기능을 이용하게 되는데, 집중에서는 적적이, 알아차림에서는 성성이 개발됩니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 위빠싸나 명상이 불교의 최고 최상의 수행법임을 알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즉, 불교는 고와 그 지멸을 위한 길이며, 그 길은 팔정도인 바, 팔정도의 핵심은 일곱 번째 덕목인 삼마 사띠(samma satu), 즉 정념(正念)입니다. 부처님에 의해 제시된 명상법인 삼마 싸띠는 사마타 사띠(止: 지)와 위빠싸나 사띠(觀:관)으로 나뉘고, 이들은 수행자를 여덟 번째 덕목인 삼마 사마디(samma samadhi), 즉 올바른 삼매인 정정(正定)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중 위빠싸나 사띠에 의해서 깨달음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끝)